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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전남 귀농어귀촌 온라인 박람회-진도군]왜 하필 고춧가루였을까?
등록일 : 2021-10-19 작성자 : 서울센터 조회수 :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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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및 상세 [전남 귀농어귀촌 온라인 박람회-진도군]왜 하필 고춧가루였을까? _3

왜 하필 고춧가루였을까? 

(부제, 엄마처럼 살고 싶은 딸의 이야기)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



벌써 7년이다. 진도에 내려와 아가씨농부로 살아간 지 말이다. 

7년간의 귀농스토리를 시작하려면 먼저 우리 엄마 얘기부터 해야 한다.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을 때, 그러니까 20대 초반에 경기도 용인에서 우리 아빠를 만났다. 

당시 아빠는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진도로 온 식구가 내려오게 되었다.

엄마는 달랑 아빠 하나만 보고 연고도 없는 시골로 내려온 것인데, 처음에는 마치 외국어처럼 사투리를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건 사투리뿐만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인 우리 허양념 할머니는 올해 97세로 무려 40세에 늦둥이이자 막둥이로 우리 아빠를 낳으셨다.


나이가 아주 많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편견과 은근한 텃세가 가득한 시골에서 친구와 친정 없이 살아가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광고일 만 하던 아빠가 나 중학생 무렵 시작한 농사는 수년간 쫄딱 갈아엎기만 했다.

어떤 시기에 무엇을 심는지도, 무슨 약을 하는지도 잘 몰랐던 아빠는 ‘잘 몰랐던 죄’로 독한 약들을 하지 못했다. 

남들 밭의 배추와 대파들은 크고 무겁고 잘생겼는데 우리 집 애들은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벌레가 무참히도 먹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가까운 진도군 농업기술센터만 갔더라도 도움을 많이 받았을 텐데 싶었지만 그 수년간의 고통이 진도농부의 ‘전설’을 만들어주었다.


어쩌다 진도까지 시집와서 힘든 농사일만 죽어라 하던 엄마는 시골살이와 농사에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하소연할 친구가 없으니 당시 ‘미니홈피’에 일기처럼 푸념을 적었다. 

우리 집 배추는 약을 안 해서 비록 작지만 이렇게나 달고 맛있는데 상인들은 우리 배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일 모레 애들 소풍가는 날인데 도시락 싸줄 돈도 없다. 농사를 짓는 게 너무 힘들다.

착한 엄마가 하늘이 보기에도 너무 불쌍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하고 엄마의 하소연 가득한 일기를 읽었다. 

그 때는 ‘친환경’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을 때였는데, “농약 안 한 그 배추, 내가 살게요.”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농사를 지으면 무조건 상인들만 목 빠지게 기다리던 게 당연하던 때라, 얼떨떨했던 엄마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 지, 

배추를 택배로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우리 집의 직거래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밭에서 나오는 모든 농산물을 100프로 인터넷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엄마에게 직거래는 단순히 유통방법의 전환만이 아니었다. 힘들게 농사지어 만든 농산물의 가격을 직접 정하고, 

제값 받고 판매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도시의 소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주었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새벽별을 보고 나가 새벽별을 보고 들어오는 부모님의 피땀눈물이 고작 몇 푼으로 돌아오는 것이 지긋지긋해 

어떻게 해서든 시골을 벗어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막상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보니, 직거래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하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농사는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더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농산물을 만들 수 있을까 즐겁고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떠난 진도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처럼 살고 싶어서 

대학교의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르던 2015년 12월 14일, 완전히 진도로 내려오게 되었다.




<왜 하필 고춧가루였을까>



처음 집에 내려와 두 가지를 보고 경악을 했다. 

하나는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들, 또 하나는 쓰지도 않고 유지비만 내는 허접한 홈페이지였다.

그 당시 ‘e-비즈니스’라는 것이 유행해서, 농부들도 홈페이지를 만들고 직거래를 하는 교육이 유행했다고 한다. 

엄마의 홈페이지는 바로 삭제했다. 대신 블로그와 SNS를 적극 활용해 돈 한 푼들이지 않고 농산물을 팔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청년농부들이 많지 않았는데, 글쓰기 좋아해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운영하던 나의 블로그를 보고 여기저기 방송국에서 많은 연락이 왔다.

블로그와 SNS를 열심히 한 덕에 <인간극장>, <여섯시 내고향>, <아침마당> 기타 등등 

방송출연만 수십 번을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홍보도 많이 되고 매출도 올랐다. (이건 내가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한다.)


홈페이지 삭제야 쉽게 해결했지만,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작물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네다섯 개씩 농사를 지으니 꾸준히 현금이 도는 것은 장점이었지만 

말 그대로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는 것, 작물에 대한 전문성과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하우스에서 아빠의 모종을 스물 몇 개 까지 세고 진이 빠진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여쭤봤다. 

‘고객이 왕’인 우리 부모님께서는 고객이 찾는 농산물을 하나 둘 씩 심다보니 결국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봄에는 홍감자, 여름에는 고춧가루, 가을에는 햅쌀(향기미), 겨울에는 절임배추 딱 네 가지를 메인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많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많은 모험을 했다.

메인 작물의 필요성에 온 가족이 합의하는 데까지 삼년 이상 걸렸고(특히 아빠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참 많이도 싸웠다)

메인으로 생각했던 작물을 매년 피치 못할 이유로 포기해야 했다. 가령, 대파는 가격등락이 너무 심해서 패쓰, 

미니밤호박은 손이 많이 가는 것에 비해 보관이 어려워 패쓰(사과나 포도처럼 명절 선물로 쓰려고 비싼 돈을 들여 패키지까지 맞췄었는데 말이다)

마늘도 비슷한 이유로 패쓰.


우리 농장의 강점이 무엇일까, 본질부터 생각해보았다. 

직거래로 시작했고, 직거래의 본질은 고객이다. 우리 고객들의 특징은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채소는 너무나 많고 흔하지만 그 채소를 만드는 우리 가족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을 믿고 기꺼이 비싼 값을 지불해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특히나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고춧가루와 절임배추의 공통점은 1년 반찬이자 가정의 필수품이기 때문에 깐깐하게 따지지만 한 번 믿음을 받으면 평생 고객이 될 수 있는 품목이다.

우리 절임배추 고객들은 10년 이상 단골들만 100명이 넘는다. 그래서 고춧가루를 선택했다, 든든한 우리 고객님들을 믿고서.


고추농사는 정말 힘들다.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밭작물의 만렙’이라고 소개할 정도다. 감자는 바로 땅에다 심고 수확하면 끝이다. 

고추는 수확할 때 까지 키가 클 때 마다 끈을 쳐줘야 한다. 수확한다고 끝이 아니다. 세척해서 건조하고 선별해서 꼭지를 따고 나면 가루를 내야 한다.

다른 작물보다 몇 단계나 손이 더 많이 가지만 우리만 기다리는 고객분들 덕분에 포기할 수가 없다. 

3년 전부터는 우리 고춧가루는 고추를 밭에 정식하는 4월부터 예약을 받는데, 고춧가루를 받기까지 삼 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한 달 이내로 마감이 된다.

우리 고춧가루 자랑을 더 해보자면 내가 생각하는 세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첫째는 맛있는 태양초를 사용한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고추를 따면 바로 물세척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꼭지 사이에 물기가 들어간다. 

그 물기만 말리는 정도로 기계건조를 하고 그 이후로는 몇날며칠을 햇볕 밑에서 태양초로 말린다. 

아빠가 말해주신 태양초가 맛있는 이유는 몇 번의 밤 동안 이슬을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우리 고추는 척박하게 자라고 척박하게 말라서 그런지 고추 주제에 단맛도 있고 과일향도 난다(고 고객들이 그랬다).


두 번째는 전통식 쿵덕방아를 사용한다. 

몇 해 전, 우리 고춧가루가 다 떨어져서 마트에서 고춧가루를 사먹은 적이 있는데 왠지 더 칼칼하고 맛이 덜 했다는 것이 우리 가족들의 의견이다. 

그 차이는 좋은 고추를 쓴 것도 있지만 쿵덕방아에 있다고 생각한다. 칼 분쇄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쿵덕방아로 마무리를 해주면 고추씨 안의 기름이 더 잘 베어 나오는 것 같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나와 엄마의 미각이 보증한다. 

그래서 재작년에 방앗간을 만들었을 때 굳이 특별 의뢰를 해서 쿵덕방아를 들였다.


가장 특별한 세 번째는 커스터마이징 고춧가루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고객 한 분 한 분 개인별로 고춧가루를 맞춤 제작해드리는 것인데 

생각보다 고춧가루에도 커스터마이징 할 요소들이 많다. 기본적으로는 매운 정도가 있고(우리 식구들 모두 매운 것을 못 먹어서 기본 맛은 순한 맛이다)

가루의 굵기, 씨를 뺀 정도, 그에 따른 고춧가루 색깔의 정도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조합해 그 분만을 위한 고춧가루를 만들어드린다.

가뜩이나 고춧가루 자체가 손이 많이 가는데 이렇게 커스터마이징을 하다보면 한 번 빻을 고추를 네다섯 번 빻아야 한다. 

무엇보다 한 분 한 분 개인 상담을 해드려야 하는데 이 과정이 힘들고 지루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객들과 더 친해지는 기분이 들어 감사하다.


올해는 고추만 해도 무려 15,000주를 넘게 심었는데, 사람이 더워도 되니 여름에는 여름답게 장마 대신 고추가 잘 익을 수 있도록 쨍쨍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나도 이제 농부가 다 된 모양이다.



<진도아이돌을 꿈꾸며>




아빠의 고향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내가 묻힐 곳이 된 나의 진도는 여러모로 참 감사한 곳이다.


처음 내려왔을 때, 당연히 월급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엄마는 알아서 살라며 어미호랑이 같은 소리를 했다. 

그때는 친구도 없고, 맨날 아빠랑 싸우기만 하던 내게 엄마는 바람이라도 쐴 겸 교육을 받아보라며 진도군 농업기술센터로 보내주셨다. 

대학교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여자애가 농사를 짓겠다며 내려왔으니 기술센터에서도 내가 퍽 기특한 모양이었다.

마침 전남농업기술원에서 실시하는 청년창업공모전에 도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는데

그 덕분에 얼떨결에 창업을 하며 엄마와는 독립된 사업체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나에게 책임감을 심어준 엄마에게 정말 감사한다.


기술센터는 마침 집과도 가까워서 자주 놀러갔는데, 정말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작년에는 기술센터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농장에서 팜파티(이름하야 ‘홍감자 구출대작전!’)를 진행했다. 

이 때 얻은 자신감으로 올해부터는 농장에서 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기후변화로 스마트팜과 시설농사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었는데, 올해부터 기술센터의 200평짜리 임대농장하우스에서 고추를 키우고 있다. 

비가와도 알아서 문이 닫히고, 물도 알아서 자동으로 나가니 너무 신기하다.


내가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진도군 4H 회원들 얘기도 빠질 수 없다. 엊그제 우리 집 모내기도 4H 오빠들이 해줬다. 

작년에는 사에이치 회원들 중 ‘청년창업농’ 도전자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모의면접도 진행했다. 젊은 남녀가 모여 비료 얘기, 농약 얘기 하는 게 너무 재밌다.


분명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떠난 진도였는데, 지금은 자처해서 진도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스펙이라는 것을 쌓으며 나름 열심히 살고 있던 나에게 엄마는 그랬다. “너도 남들처럼 이력서 한줄 채우려고 사는 거니?”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멍하게 만들었고,

“힘들다고 그만 두면 다른 게 아까운 게 아니라 우리만 보고 있는 고객들과의 인연이 아깝다”는 말은 나를 진도로 내려와 엄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직거래를 하게 만들었다.


요즘 매일 같이 엄마와 밭에서 사느라 손톱 밑이 시꺼멓다. 얼굴도 시꺼멓게 다 탔다.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다.

엉덩이 의자를 끼고 엄마와 나란히 앉아 하루 종일 조잘거리는 게 재밌다. 오늘은 뭐할까, 내일은 뭐할까, 내년에는 뭐할까 행복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재밌다. 

그냥 엄마가 곁에 있어서 재밌다. 엄마도 나랑 같이 농사짓는 게 재밌어야 할 텐데.


엄마처럼 살기 싫다며 쾅쾅 박아댔던 대못이 아직 안 빠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상처를 엄마처럼 더 열심히,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매워주고 싶다.

진도와 엄마는 내게 영원한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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