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이라서 행복한 사람들 이야기돌아보면 믿어지지 않는 삶의 대전환이었다. 2022년 9월 말, 우리는 전라남도 고흥에 왔다. 첫째 봄이가 6살, 둘째 여름이가 4살, 그해 1월에 태어난 셋째 가을이가 네 발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할 때였다. 남편과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땅, 친척도 지인도 그 누구도 없는 무연고의 땅. 그러나 큰 산과 큰 바다가 있는 곳. 숲으로 둘러싸인 곳. 끝 간데없는 하늘과 들판이 펼쳐진 곳.코로나 팬데믹, 모든 것이 멈추었던 2년 여의 시기를 보내던 어느 날 남편은 나에게 선언처럼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 여러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미 첫 마디 메시지에 공감하고 동의했다.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세상. 전 세계인들을 죽음의 위협으로 몰아넣은 팬데믹. 거리를 걷는 모든 이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생활권이 통제되었던 시간들. 그리고 우리 곁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 도시를 벗어나자. 자연으로 가자. 그게 시작이었다.그때부터 남편과 나는 도시를 떠나 우리가 살 곳을 두루 살폈다. 가깝게는 경기도 양평과 용인에서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 산내마을, 경남 합천, 충북 괴산, 제주까지... 실제 우리가 탐방했던 곳들이다. 그야말로 전국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당시 서너 살이었던 첫째와 아기띠에 몸을 맡긴 둘째와 함께 여행하듯 돌아다녔다. 특히 거주할 ‘집’에 관한 것은 가장 현실적인 어려움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역에 덜컥 집을 구하기도, 매월 월세의 부담을 안기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우리를 환대하는 곳은 없었다. 고흥에 귀촌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계기는 ‘청년농촌보금자리’ 덕분이다. 농림축산 식품부가 귀농귀촌 청년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이끈 청년농촌보금자리 조성 사업에서 고흥은 첫 1기에 선정된 네 지역(괴산, 상주, 서천, 고흥)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밤늦게까지 충북 괴산을 귀촌지로 알아보다가 이 사업을 처음 접했다.‘와, 이런 곳이 있구나. 우리 가족도 갈 수 있을까?’ 1기 청년농촌보금자리 네 지역(괴산, 상주, 서천, 고흥)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밤늦게까지 충북 괴산을 귀촌지로 알아보다가 이 사업을 처음 접했다.‘와, 이런 곳이 있구나. 우리 가족도 갈 수 있을까?’ 1기 청년농촌보금자리 네 지역을 모두 살핀 결과, 모집 가구와 기한이 남아 있던 곳은 단 한 곳. 바로 ‘고흥’이었다.동이 터오던 새벽, 아직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여보, 고흥으로 가자! 고흥이야!”“뭐? 우리 가족은 고흥 청년농촌보금자리에 입주자로 선정돼 둥지를 틀게 된다. 귀촌 첫해, 우리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 기관에 바로 보내지 않고 오롯이 고흥과 보금자리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바다로 산으로 참 많이도 다녔다. 거금도 익금해수욕장, 팔영산 편백치유의숲, 우주천문과학관, 앵무새체험장 등 우리 가족이 애정하는 곳이다. 우리는 고흥살이 적응 기간을 2년 정도로 잡았다. 그 기간 고흥에서 직장을 바로 구하지 않고 생산자로 사는 삶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남편이 마당 텃밭에 녹비작물(화학비료를 대신해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는 식물)을 심은 게 첫 단계였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고흥에서의 삶.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으로 내디딘 그 한 걸음이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 시켰는지.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보다 ‘경쟁’이 기본값이 세상에서 그 이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진짜 바라고 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향해가야 나아가야 할 것인지 삶을 통해 알려준 고흥에서 지금 바로 여기, 우리가 찾은 행복의 조각들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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