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은 나의 고향이 아니었다. 친구도, 가족도, 내 커리어도 없는 그곳.처음엔 두려웠다. 귀향이라는 단어는 듣기엔 따뜻하고 낭만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남편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내려올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보다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더 컸다.바쁘고 치열했던 도시를 벗어나, 조용한 고흥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도시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완전히 다른 속도의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삶과 시골의 속도는 예상보다 아주 달랐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도시의 속도는 없었고, 나는 누구의 동료도, 고객도 아닌 한 사람의 며느리이자 아내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차분하고 천천히 가는 시간 안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큰 용기였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려오던 작은 꿈이 있었다 작은 카페, 평화로운 일상. 고흥에 도착한 우리는 ‘더리터’ 프랜차이즈 카페를 열기로 했습니다. ‘내 가게를 낸다’는 설렘은 하나둘씩 비용 앞에서 무뎌졌다. 처음 프랜차이즈를 선택한다는 게 망설여졌지만, 고흥군의 청년 귀향 창업지원을 통해 초기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다. 공간을 구하고, 인허가를 받고, 첫 장비를 들여오고, 하나씩 매장을 준비해 나가는 과정은 여전히 바빴지만, 도시에서의 바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미 있는 분주함’이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처음 몇 달은 남편과 나, 둘이서 모든 걸 했다. 오픈 준비는 새벽 6시부터 시작했고, 마감은 밤 10시를 넘긴 적도 많았다.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서빙과 청소, 재고 정리까지 도맡았다. 손님 없는 시간은 불안했고, 손님이 몰리면 정신없이 힘들었다. 중간이 없었다. 극과 극이었다.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가끔은 왜 우리가 이 길을 선택했는지 잊기도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카페는 마치 섬처럼 텅 비었다. 이 선택이 맞았을까?” 하지만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카페를 운영하며 흔들리지 않고 누구보다 성실했고, 그 성실함은 이 마을에서도 빛을 발했다. 손님들은 하나둘 늘어 났고, 조금씩 단골이 생기고, 마을 주민들과 정을 나누면서 카페는 점점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 생각보다 수입도 안정적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비로소 “살아간다”는 감각을 되찾아갔다. 무엇보다, 이 고장 친구들, 남편의 지인들이 건네는 따뜻한 관심과 응원이 우리를 지탱해줬다.“요즘 어때?”“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이런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붙잡아줬다.작지만 따뜻한 이 공간은, 우리 가족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처음 이사온 아버님의 집은 낡고 오래된 주택이었습니다. 가끔 명절 때, 생신때 들러 잠시 있을 때는 몰랐던 부분이였죠.시아버님이 서울에서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장루를 단 채 고흥으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우리 가족은 다시 삶을 세워야 했습니다. 몸이 불편해지신 아버님이 예전처럼 혼자 방을 오가기도 어렵고, 무릎으로 앉아 일하시던 텃밭에도 나가기 힘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낡은 주택, 세월이 고스란히 스며든 구옥. 언젠가는 손보아야 했지만 당장 여유가 없던 상황이라 미뤄두고 있었죠. 그런데 아버님이 수술을 마치고 오셨을 때, 아이가 함께 커갈 우리는 이 집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흥군의 귀향청년 주택수리 지원사업 덕분에 집을 하나하나 고쳐나갈 수 있었습니다.고흥군 귀향청년주택수리지원사업, 처음엔 ‘우리가 해당될까?’ 망설였지만, 문을 두드렸고, 다행히 지원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멋지게 산책할 수 있게 아버님 전용 드레스룸도 꾸며 드리고 잠금장치도 허술해 외부인도 서스럼없이 오갔던 대문도 튼튼하게 바꾸고 비오는 날이면 비 맞으며 다닌 부부화장실에도 비막이 차양도 설치하고 아기 목욕시킬 때 필요했던 욕실수납장도 만들면서 함께 사는 집을 만들었죠 시아버님은 새롭게 단장된 집을 보며 “살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기의 방을 새롭게 꾸미며 가족 모두가 머물 수 있는 진짜 보금자리를 완성해갔습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공간들을 고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버님이 장루 상태로 편하게 지내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드레스룸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흔들흔들 불안했던 간이행거가 튼튼하게 바뀌고 아범님이 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숨이 한결 편하다.” 그 말을 듣는데, 진작 해드릴 것을 이라는 후회도 있었죠. 그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귀향은 단순히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요. 고흥군에서 받은 주택 수리 지원은 그저 집을 고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흥에 내려온 뒤로 제가 받은 건 단지 귀향 청년 지원금이나, 집 수리비용, 돌봄 지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원이 만들어준 ‘여유’와 ‘기회’ 덕분에, 저는 관계를 맺고, 가치를 느끼고, 다시 제 꿈을 꿔볼 수 있게 되었습니 직장을 그만두면서, 귀향하면서, 도시와 멀어지면서 나는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 앞에서 전공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하지만 삶이 조금씩 자리 잡고, 고흥이라는 따뜻한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는 귀향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선택’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귀향은 단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꿈을 다시 품은 길이었고, 그 꿈을 삶 속에서 실현해가는 시작이었습니다.고흥에서 만난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다시 내 마음속에서 싹을 틔운 건축과 공동체에 대한 열정.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저는 지금 단단하고 의미 있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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