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6일 전남광주 보성의 보림제다에서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차밭을 관리하고 있다.
세계적 말차 열풍에 美 뉴욕 바이어까지 보성행…중국·일본에도 수출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말차(抹茶) 열풍에 국내 최대 차 주산지인 보성 지역 차농(茶農)들은 요즘 주머니가 두둑하다. 말차가 세계적 붐을 일으키면서 너도나도 말차 확보에 나서면서다. 보성에서 3만㎡(약 1만평)가량의 녹차밭을 경영하는 서상균 한국 차자조회 회장에 따르면, ㎏당 5만원하던 말차 가격은 14만원으로 3배 가까이 치솟았다. AI(인공지능)발 수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가격이 급등한 것과 같은 열풍이 보성에 몰아닥친 것이다.
“벼농가들이 발가락으로 돈을 셀 때, 366일(365일+1일) 일을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보성 녹차 농가들의 대변신이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 7월 16일, 보성군 보성읍에 있는 녹차가공유통센터에서도 대당 2억원이 넘는다는 초미세분쇄기 2대가 우렁찬 굉음을 내어가며 말차를 곱게 갈아내고 있었다. 녹차가공유통센터에서 만들어진 말차는 저온창고에 보관됐다가 국내외 식품기업들로 납품된다. 이날 초미세분쇄기에서 갈려나온 짙녹색의 말차를 한줌 쥐어 손바닥에 올려보니 곱디고운 여성용 파우더를 연상케 했다.
말차 찾아 보성까지 온 美 바이어
참치로 유명한 식품기업 ‘동원’에 말차 등 녹차원료를 납품하는 보림제다 서희주 대표도 요즘 말차 열풍에 눈코 뜰 새가 없다. 한국차의 개척자인 고(故) 서양원 한국제다 회장의 딸인 서희주 대표는 광주에서 보성으로 시집을 와서 보성에서 차밭을 일궈보라는 부친의 권유에 남편과 함께 차밭을 일궜다. 지금은 홀로 10만㎡(약 3만평)에 이르는 차밭을 경영하면서 녹차 체험학교도 운영 중이다. 보림제다에서 생산한 각종 차 제품은 페트병에 담기는 ‘동원 보성녹차’ ‘동원 보성말차’의 원료로 들어간다. 다원 내에 있는 보림차연구소에서 마주 앉은 서희주 대표는 “요즘은 미국 뉴욕에서도 말차 원료를 구하기 위해 바이어들이 찾아올 정도”라고 말했다.
보성군에 따르면 보성산 말차는 최근 미국, 캐나다, 영국은 물론 차의 본산인 중국, 일본으로까지 수출된다. 1996년 일본 차음료 시장 부동의 1위인 이토엔(伊藤園)의 기술자를 초빙해 국내 최초로 ‘보성녹차캔’을 선보인 임화춘 퀀텀녹차 대표에 따르면, 보성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녹차의 주산지로 낙점된 까닭은 일본 차의 본산인 후지산 아래 시즈오카(靜岡)와 같은 위도에 위치해 있어서다. 한때 80만㎡(약 24만평)에 달하는 차밭을 경영한 그에 따르면, 섬진강 지류인 북쪽의 보성강과 남쪽의 득량만으로 둘러싸인 보성은 연중 기온 섭씨 13~14도, 연평균 강수량 1300~1500㎜로 차 나무들이 물을 머금고 있기에 최적의 생육환경을 자랑한다.
전남광주 보성의 한국 차박물관.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보성읍과 회천면 사이의 해발 466m 활성산 구릉인 ‘봇재’ 일대 물빠짐이 좋은 비탈에는 차밭이 조성됐다. 현재 보성군이 조성한 녹차 테마문화공간이 자리한 ‘봇재’는 과거 찻잎을 짊어진 보부상들이 봇짐을 내려놓고 쉬어가는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정희 정부 때는 커피 수입이 급증하자 이를 대체하고 농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 ‘봇재’에 자리한 대한다원을 중심으로 차밭을 일구기 위한 대대적인 산지개간도 단행됐다. 그 결과 지금은 797만㎡의 차 밭에서 570여 농가가 약 6405t(생엽 기준)을 수확하고 있다. 국내 전체 차 생산량의 40%에 가까운 물량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오늘날 보성을 한국의 ‘차도(茶都)’로 만든 셈이다.
말차는 최근 보성 녹차의 인기를 견인하는 대표 품목이다. 실제로 보성에 산재한 차밭에서는 차나무를 검은색 그물 등 차양막으로 덮어씌운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국산 차나무는 입이 작은 ‘소엽종’이 주종인데, 잎이 어느 정도 자라면 말차를 만들기 위해 2~3주간 반드시 차양을 해야 한다. 보성에 머물며 각 다원들에 자문을 하는 차전문가 서영수 감독은 “햇빛을 차단해 차나무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라며 “쓴맛을 내는 카테킨을 낮추고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7월 16일, 전남광주 보성의 녹차 테마 문화공간 '봇재'에 보성 각지의 다원들이 소개돼 있다.
“말차, 더 편하게 먹을 수 있어야”
물에 우려 마시는 일반 녹차는 차 성분의 30~60%만 음용하지만, 녹차를 갈아만든 말차는 물에 녹지 않는 비타민A나 토코페롤, 섬유질 등을 100% 섭취할 수 있다. 가루 형태로 제조되는 까닭에 말차케이크, 말차초콜릿과 같은 제과제빵은 물론, 국수, 수제비, 각종 음료첨가제까지 활용도 무궁무진 가능하다. 생산자 입장에서도 단순 음료 외에도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기 용이하다.
보성읍에서 국내 최초 말차 전문 농장인 ‘임병문다원’을 2대(代)째 운영 중인 임상현 대표는 말차를 더욱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스타벅스 커피처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말차를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품을 내기 위해 차선(茶筅)을 휘저어 격불(擊拂)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되레 말차 대중화에 걸림돌이란 것이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이날 기자 앞에서 투명텀블러에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고급 말차가루와 시원한 냉수를 넣은 뒤 칵테일처럼 흔들어 거품이 올라간 냉말차를 만들어 보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임상현 대표는 광주에서 은행원을 하다가 가업을 잇기 위해 고향 보성으로 내려왔다. 현재 고인이 된 아버지(임병문)의 뒤를 이어 4만㎡(약 1만2500평)의 녹차밭을 경영하면서 국내 유명 식품대기업 및 제과제빵 업체에 말차를 납품 중이다. 셔츠 앞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말차스틱을 만들어 더 편하게 말차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그의 꿈이다. 임상현 대표는 “입자가 미세한 말차는 정전기로 인해 소형 스틱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면서도 “스틱 말차를 만들어 누구나 말차를 편하게 마실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기자 : 이동훈 기자
출처 : 주간조선 바로가기(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5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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